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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기독교

 

오늘 우리 주변에는 두 개의 기독교가 있다.

같은 용어 단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라고 하는 단어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두 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이다.


 

가독교라는 단어로 표현되지만

전혀 다른 존재 다른 의미 다른 가치관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기독교라고 할 때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이다.

종교라는 것은 이 사회에 긍정적인 기능을 하고 있고

없어서는 안될 구성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불교나 이슬람이나 힌두교나 

이런 종교들을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들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단이란 성경을 말하고 기독교인척 하지만

사실은 다른 것을 말하는 집단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단과 다른종교는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종교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쁘게 보거나 적대시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된다.

구원의 진리로 인정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종교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고

그 종교의 기능을 우리는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종교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어쩌면 필수적인 요소이다.

인간은 불안하고 결핍에 갈증이 있다.

그래서 종교를 통해서 마음의 위로를 추구하고

자기 욕구를 추구하고 내적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종교가 없다면 인간은 스스로 느끼는 불안과 고통을 극복해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인류의 아편이라는 말이

사실이다.

 

아편처럼 인간을 일시적으로 위로하고 통증을 제거하고

일시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 종교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가 종교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로서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세상의 종교들은 스스로 종교라고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을뿐 아니라

다른 엉뚱한 포장지로 소비자들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난 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라고 하는 집단들이다.

그들은 종교적인 특징과 색채를 드러내고

그런 종교의 목적을 추구하고

종교로서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가 아닌 것처럼, 다시 말해

신앙인 것처럼 포장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양두구육이라는 말처럼

양대가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팔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

종교의 방향을 추구하고 

노골적인 종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의 길로 나가고 있는가?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종교와 신앙의 특징을 알아보자.

 

종교의 특징은

첫째, 철저하게 행위주의적이다.

행위주의, 공로주의이다.

행위주의에는 갸율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준이고 잣대이다.

이 잣대를 만들어야 종교가 유지된다.

 

잣대가 있어야

그래야 종교심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고 

서열을 매길 수 있다

그래야 그에 따르는 보상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이 아무리 율법주의를 비난하고 

바리새인들을 욕한다고해도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들이 비난하는

율법주의 행위주의 공로주의를 벗어날 수가 없다

아니 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목적이고

사람들의 헌신과 열심을 추출해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위주의를 말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행위나 공로를 주장 할 수가 없다.

신앙은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고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다.

사랑이 본질이며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이 신앙이다.

그러니 행동을 평가할 수가 없다.

마음을 점수매길 수 없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끊임없이 

종교계율을 새로이 만들어 낸다,

종교기술자들은 규정을 많이 만들수록 

자신들의 전문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규정들을 만들어 내기에 분주하다.



 

하지만 신앙은 형틀로 규정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점수를 매길 수도 없다.

 

둘째로 종교는 계급적이다.

그래서 직분을 소중히 여기고

직분으로 사람들을 속박한다.

직분을 수여하고 그에 상응하는 특권을 

허락하는 시스템으로 그 조직이 유지가 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굳이 직분 장사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직분을 주고 헌금을 걷고 직분으로 예배당을 짓고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종교인들에게는 하등의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신앙은 전혀 그런 특성이 없다.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셋째로 종교는 물량적이고 가시적인 것에 치중한다.

물량주의의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종교의 목적이 인간의 위로와 화평 만족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제공하는 자들도 그런 자기 위로와 

만족과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며

종교를 필요로 하는 소비자도 

역시 자기만족 위로와 욕구충족이 목적이기에

물질적이고 물량적일 수 밖에 없다.

 

넷째 종교는 중재자가 있어야 하고 중요하게 여겨진다.

소위 종교인이 필요하다.

신과 인간의 중재자, 샤먼이 있어야 종교가 성립이 된다.

순수 한국말로서는 무당이다.

무당은 귀신과 인간의 매개이다.

귀신의 소리를 듣고, 귀신의 존재를 보고

그것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대언하는 것이 무당이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무당이 없는가?

만인제사장설이라는 말은 

소위 모든 평신도들도 아는 전문용어이다.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제사장이 

예수 십자가 이후에는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목사들은 스스로를 제사장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종임을 자처한다.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비자들인 종교소비자, 신도들은

역시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무당을 찾는다.

목사가 무당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 대신 기도해주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힘든 삶을 살아주고

그들의 부족함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간단하게 무당에게 복채만 주면 해결되기 때문에 이보다 더 편리한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종교와 신앙의 차이를 

말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생략한다.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를 믿는가?

아니면 신앙으로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가?

자신을 평가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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