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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변화, 

약복강사건 

그 이후 야곱의 삶


야곱은 성자인가? 속물인가?

그는 속물이다. 변화된 속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성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야곱은 본래부터 성자라고 말하지 말자

타고난 성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기다림으로 인하여 변화된 사람이다.



약복강 사건 이후,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의 삶을 추적해보자

그는 과연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디나 사건에 대한 야곱의 태도

세겜에 정착한 야곱의 가정은 그곳에서 불행한 일을 겪게 된다. 딸 디나가 그곳 추장이었던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를 빌미로 무참한 살육의 복수를 감행한다. 야곱은 이일로 아들들을 책망하고 자신이 도망하던 중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장소 벧엘로 올라간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이방신상과 귀걸이를 땅에 묻고 벧엘에 이동하여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부른다(35:7). 엘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므로 하나님 집의 하나님, 즉 그가 환난을 피하여 달아날 때 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기억하고 부른 것이다.

 




야곱이 두려워할 때...

그 즈음 다시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35:10-12)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을 확인시키심과 동시에 다시금 야곱의 사고를 환기시키신다. “왕들이 네(야곱) 허리에서 나오리라야곱의 허리는 이미 얍복강에서 씨름하던 중에 부러진 그 허리(에렉크, 환도뼈) 남자의 힘을 상실한 야곱,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야곱의 그 허리에서 열왕이 나오게 할것이라는 하나님의 방식을 깨우치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야곱 자신의 능력이나 잔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선언하신다. 이렇게 야곱은 조금씩 하나님의 방식을 알아가고 깨달아가고 있었다.

 


야곱의 유언

야곱의 마지막 임종은 그의 변화를 확실히 알게 한다. 그는 유언한다. 그의 유일한 요구는 자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48:29-30) 앞서 요셉은 기근 중에도 애굽을 성공적으로 관리하여 그의 권력 기반은 확고하게 다져진 상태였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약속의 땅을 소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땅에 함축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약속을 바라보았던 것이다(48:2-4).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함

이 장면은 야곱 생애의 절정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성경은 그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손자를 축복하려는 야곱 앞에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를 아버지의 오른 편에, 에브라임을 아버지 야곱의 왼편에 향하게 했다. 하지만 야곱은 오른손을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왼손을 펴서 장자 므낫에의 머리에 얹는다.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48:12-14)

 

요셉은 이를 원치 않았고 아버지의 손을 옮기고자 했으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48:19)” 하였다.

이 모습에 많은 사건들이 오버랩되어 보여주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워 두 아들에게 축복한 장면이나, 스스로 큰자가 되고자 속임수를 펼쳤던 자신의 모습이 함께 겹쳐지면서 이제 야곱은 눈은 어두웠으나 하나님의 방식에 눈을 떠서 스스로 크고자 하는 자가 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큰자임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질서

이것은 천국의 질서이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0:26-27에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덕목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된 자이다 왜냐하면 그가 천국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천국은 결코 부요한 자가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질서가 전도된 나라, 거꾸로 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야곱은 죽음에 임하면서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스스로 쟁취하고 그 쟁취한 것을 지키기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야곱은 그의 평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나라의 원리는 작은 자가 큰 자이며,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얻었고 누가 잃었는가라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섬기므로 모두가 온전해지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방식이다. 거룩한 재물이 불태워 희생제물이 되므로 부정한 것이 거룩하게 되는 방식이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브리서 11:21)

 

야곱은 성자인가, 속물인가?

하나님이 천사가 되라 했는가?

인간이 되라 하셨다


이제 처음 던진 질문에 답할 순서이다. 야곱은 성자인가, 속물인가? 세속적인 기독교, 즉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야곱은 매우 성실한 성자이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과 열심으로 얻고자하는 바-, 축복을 받았으니 믿음이 좋은 성자라고 평가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믿음이다. 자기 확신이고 신념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그 욕망이 선한 욕망이든 타락한 욕망이든 간에-을 추구하는 수단인 종교세계에서는 훌륭한 인간, 성실한 인간이지만, 복음 안에서 그러한 삶은 복음의 원수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일 뿐이다.

 




이처럼 야곱 속물이었다. 종교라는 포장지로 포장하여 거룩의 탈을 쓴 속물이다.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속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인간임을 발견한 것이다. 창조주 안에 존재하는 피조물인 인간, 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너무나 많은 인간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내 백성이라 선언하시고 거룩이라는 옷을 입혀주신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다. 사람도 이기고 하나님마저도 이겨 먹으려한 그 야곱, 그 위에 언약의 공동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신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다. 그래서 그는 성자이다.

 

속물일 수 밖에 없는 야곱, 아니 속물로 살았던 야곱, 그러나 속물이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속물 인생임을 인정하였기에 그는 진정한 성자였다.

 


돌아온 탕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누가복음15장에 등장하는 두 아들의 비유, 즉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야곱과 에서의 역사는 탕자와 맏아들의 비유와 유사한 점들이 많다. 맏아들이 모범생형이라면 야곱은 사고뭉치 아들이다. 아버지 집을 떠나 가진 것을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씹는 탕자와 돌베개를 베고 누운 야곱의 모습, 에서의 불평과 아버지를 향해 불평하는 맏아들의 모습이나,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맞아 안고 입을 맞추는 것과 달려가서 야곱을 안고 입 맞추며 우는 에서의 모습을 볼 때 우리로 하여금 야곱은 구약의 탕자가 아닐까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돌아온 탕자, 우리는 야곱에게서 그 탕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거룩하고 완벽한 인간보다 탕자 같은 야곱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연민을 느끼게 된다.


 


최종적인 이야기

인간이 되라

천사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도 동일하리라 여긴다.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이 천사인척 한다면 역겹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인간이 인간의 지위(분수)를 박차고 나간 것이 원죄요, 타락 사건의 본질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천사라고 착각하는 순간, 아니 자신을 하나님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순간, 인간은 끝없는 탐욕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사가 되라하시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지금도 인간이 되라하심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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