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
가인의 후손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라
그 노래는 오늘 내가
부르는 나의 노래이다
그러면 가인의 후손들은 어떠했는가? 그들 역시 조상 가인처럼 성을 쌓는 인생을 산다. 방식은 다르지만 동일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창4: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창4: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라멕의 노래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부를 이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들만의 아성을 쌓으려했던 가인의 후손들이 그 목적하는 대로 상당한 부와 힘을 얻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다와 씰라라는 두 아내는 각각 자식들을 낳았는데 그 자식들 역시 번창한다. 야발은 육축을 하게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닥 한다.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비로소 기업형 육축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음악과 예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악을 하게되었다는 것은 살만큼 살게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배부르니까 음악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에덴의 동편의 삶은 이러했다. 우리 생각에는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쫄닥 망했다고 해야 옳은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번성하고 문명을 창출하고 상당한 부와 권력을 누리게되는 것이다.
파멸의 나락으로 가는 가인의 후손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잘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의 둘째 아내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다. 그가 한 일은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날카로운 기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를 의미한다. 자기 방어를 위해서 성을 쌓았던 가인의 후예는 마침내 자기를 방어하고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기계, 살상 무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번창하고 성공(?)한 라멕은 노래한다.
창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가인의 후예들은 자기 방어의 본능과 죄의 본성에 사로잡혀 갈수록 포학해지는 모습들을 비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번영은 결코 성공이 아님을 느끼게한다.
급기야 라멕의 오만 방자한 모습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오만방자한 라멕의 모습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여기서 창상이란 작은 찰과상을 의미한다. 작은 상처를 입힌 어린 소년을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을 내 좇을 때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신 약속 너를 해하는 자에게는 내가 칠 배의 벌을 내리겠다고 하신 말씀을 조롱하듯이 자신을 해하는 자는 칠십 칠 배로 갚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인간은 번성할수록 오만해지고 죄를 더욱 더 범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인의 역사이다.
역사의 주인공
누가 역사의 주인공인가?
가인의 후손인가
아벨의 후손인가?
그러면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겉으로 보면 화려한 문명을 창출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기계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는 가인의 후예들이 역사의 주류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려한 문명과 풍성한 부를 자랑했던 가인의 후예는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곧이어 성경 기자는 그 주인공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창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돌 맞아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라는 아들을 아담에게 주셨다. 그가 낳은 아들은 에노스였다. 여기서 에노스라는 말은 흙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다.
아담과 그 후손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과 에노스라는 이름은 무슨 연관을 가지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흙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과 그들이 비롯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다. 그러한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망각하고 흙이란 사실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야욕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역사는 피의 역사로 점철되기 시작한다. 서로 높아지려는 야욕만이 판을 치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흙이란 사실을 잊어버릴 때 인간 모임은 동물의 세계가 되고 만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누구의 삶을 추구하는가?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추구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 내심에는 에덴의 동편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도 우리는 에덴 동편의 가인의 삶을 부러워하고 그러한 삶을 얻기 위하여 부지런하며, 그 삶을 얻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다시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그것이 성공인가? 하는 사실이다.
셋의 후손을 보라! 비로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인생이 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기에 하나님을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산상수훈의 그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가난이 복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이다. 가난 때문에 인생이 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음을 얻게 되었다면 가난이야 말로 가장 큰 행복이다.
셋의 후손을 통하여
이루어 가는 구원의 역사
이제 구원의 도구가 되는 셋의 후손들을 따라가 보자. 창세기 5장의 역사는 단순하고 허무한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죽었더라고 하는 단순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들의 업적이나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없다. 과연 그들 가운데 가인의 후손만큼은 아니더라도 나타낼만한 역사가 없었겠는가?
1)셋의 후손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느끼게 된다.
첫째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인간의 역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업적을 자랑하고 영광을 자랑하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식 낳고, 몇 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결코 얼마나 벌었는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에 있지 않다.
둘째로 하나님의 관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구원이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자 인간의 역사를 간섭하시고 그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무엇을 이룩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하는 것이다.
이 족보의 핵심은 노아에게 있다. 노아에게 어떻게 그 혈통이 연결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다. 윤리 도덕책도 아니다.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처세술 교본도 아니다. 축복을 얻는 비결을 전수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구원이다.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셨는가에 초점이 있다.
2)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창세기 5장의 핵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그 한사람이 바로 에녹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5:21-22)
여기서 특이한 점은 에녹이 므두셀라는 낳고 그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이다. 가정을 버리고 하나님을 동행한 것이 아니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그 후에 또 자식을 낳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진정한 경건이란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세상속에서 가장 피조물 답게 되는 것이 경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건은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시는 것이었다. 죄를 멀리하고 나는 죄 없다고 외치며 고고한 자리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천사가 되라 하시지 않는다. 인간이 되라 하신다.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원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이 되고자한다. 천사처럼 되려한다. 은혜 받고 능력 받으면 인간이 아닌 것처럼 착각한다. 마치 자기가 신이 된 것처럼 자랑한다. 아니면 신과 더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을 은근히 과시한다. 그것은 무당이 하는 짓이다. 무당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매개를 자처한다. 스스로 영매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매가 아니다. 아무리 은혜 받아도 영매가 된다거나 신에 위치에 범접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임을 더욱 더 자각하는 것이다.
3)에녹에게 주어진 은혜
우리는 여기서 므두셀라라고 하는 특이한 인물을 발견한다. 그는 특이하게도 969세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가 죽은 해에 노아의 홍수가 찾아왔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당시에 평균 수명을 뛰어 넘어 선 장수의 사람 므두셀라, 그리고 신기하게 딱 맞아떨어지는 노아의 홍수 사건, 이 세가지 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사실을 보게 된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서 부터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그러면 므두셀라의 출생은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므두셀라의 이름을 알아보니, 창 잡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창잡은 자... 이는 파수꾼을 의미한다. 창을 잡고 경계하고 있는 성을 지키는 파수꾼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파수꾼이 죽으면 그 성은 함락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므두셀라의 이름을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하리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의 죽음과 인류의 심판, 그것은 결과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연관이 있다.
무드셀라는 187세 라멕을 낳았다. 이라멕은 노아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라멕은 182세 노아를 낳는다. 그리고 노아 600세에 홍수가 임한다. 그해가 바로 무두셀라가 죽는 해였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므두셀라의 이름 뜻은 “창 잡은 자”이다. 창잡은 자는 파수꾼을 의미한다. 창을 잡고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을 생각해 보라! 그가 넘어지면 그 성은 함락되는 것이다. 박영선 목사는 그래서 므두셀라의 이름을 아예 “그가 죽으면 셈판이 임하리라”라고 해석을 한것인지 모르겠다.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만일 에녹이 므두셀라를 통하여 심판을 내다 보았다면 그 이름의 의미는 참으로 그에게 경고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심판을 바라보는 에녹은 하루 하루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피조물인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유는 언제 므두셀라가 죽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교만한 것은 자신의 종말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종말을 내다본다면, 잊지 않는다면 진실하고 겸손할 것이며 성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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